
영화 박하사탕 줄거리 및 감상평
이창동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인 박하사탕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서사 구조를 가진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형식을 취하며, 한 남자의 삶을 거꾸로 추적해 나가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인물의 붕괴와 상실, 그리고 잃어버린 순수함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낸다. 주인공 김영호(설경구 분)의 비극적인 생애를 통해 개인의 파멸이 어떻게 시대와 사회, 역사와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서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자화상을 조명한다.
1.줄거리
영화는 1999년 봄, 기차가 지나가는 철길 위에 한 남자가 서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중년의 남자 김영호는 철길 위에서 외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이 외침을 시작으로 영화는 점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들을 하나씩 역추적해간다. 영화는 총 7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면은 점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봄 – 죽음의 문턱 철길 위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영호. 친구들과의 재회 자리에서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나타나 욕설과 폭력을 일삼고, 결국 철로 위로 향한다. 이 장면은 그의 현재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이후 펼쳐질 그의 삶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1994년 여름 – 부패한 형사 영호는 폭력과 협박으로 진술을 강요하는 부패 경찰이다. 사람들을 때리고, 돈을 받아내며, 점점 인간성을 상실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아내는 그를 떠났고, 영호는 외로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1987년 가을 – 폭력의 시작 영호는 고문 수사에 가담하는 경찰이 되어 있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을 고문하고 조작된 진술을 받아내며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시달린다.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순수한 감정은 이 과정 속에서 점점 사라진다.
1984년 봄 – 선택의 순간 군 제대 후 경찰이 된 영호는 처음으로 고문 수사에 참여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는 아직 죄책감과 인간다움이 남아 있는 영호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생존과 출세를 위해 타협하기 시작한다.
1980년 5월 – 광주의 밤 군인으로 복무 중인 영호는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작전에 투입된다. 혼란스러운 밤, 그는 우발적으로 한 소녀를 총으로 쏘게 된다. 이 끔찍한 경험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다. 이 사건은 그가 순수함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이자, 이후 삶을 파멸로 이끄는 씨앗이 된다.
1979년 가을 – 첫사랑의 시간 영호는 사진 동호회에 다니며 첫사랑 순임(문소리 분)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민들레밭에서 사진을 찍고, 박하사탕을 건네며 수줍게 사랑을 표현하던 시절. 이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영호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했던 순간이다.
1979년 봄 – 꿈을 꾸던 소년 공장에서 일하며 열심히 살아가던 청년 영호. 가난했지만 꿈과 희망이 있었던 그는 아직 삶의 방향성을 잃지 않은 상태다. 미래에 대한 기대, 사랑에 대한 떨림,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시절이다.
2. 감상평
박하사탕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인물의 과거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역행 구조는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탐색하고 그의 파멸에 대한 원인을 조명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망가진 한 인간을 보며 시작하지만, 점점 그가 한때 얼마나 순수하고 선량했는지를 알게 된다. 이 과정은 관객에게 강한 정서적 충격을 안긴다.
김영호는 단순히 타락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요된 선택과 우연의 비극 속에서 점차 인간성을 잃어간다. 군부독재, 광주민주화운동, 고문 경찰, 부패한 사회 시스템…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그를 압박하고 변화시킨다. 영호의 몰락은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조적 폭력과 시대의 그림자가 만든 비극이기도 하다.
영화 후반부에서 그가 순임에게 박하사탕을 건네며 수줍게 미소 짓는 장면은, 그가 한때 얼마나 맑고 따뜻한 사람이었는지를 상기시킨다. 이 장면은 이후 그가 겪게 될 끔찍한 일들을 떠올리게 하며 관객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외침은 단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첫사랑의 기억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죄를 짓기 전,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 순간, 영혼이 아직 맑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구원을 향한 절규다.
설경구의 연기는 이 영화를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그는 한 인물의 20년을 넘는 시간 동안의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해냈고, 인물이 겪는 감정의 파동을 고스란히 전달해준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기차를 향해 팔을 벌리는 모습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담고 있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또한 이창동 감독의 연출은 문학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통찰을 지닌다. 그는 섣부른 감정의 소비를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차분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따라가며 관객에게 사유를 요청한다. 잔잔한 시선 속에 담긴 묵직한 메시지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3. 마무리
박하사탕은 단순한 인생 회고록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집단적 기억을 담은 역사적인 서사다. 개인의 붕괴는 곧 사회의 붕괴를 의미하며, 영호의 이야기는 어느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비극이다. 이 영화는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절절한 대답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대답 앞에서 숙연해지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들리는 기차 소리와 함께 영호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은, 그가 돌아가고자 했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는지를 묻는 듯하다. 당신은 그 시절을 기억하는가? 당신은 그 순수를 간직하고 있는가?